2007년 6월 17일 일요일

수박의 숙성도

<기고>박용기의 표준이야기
잘익은 수박
한여름 밤 잘 익은 수박 한 통을 잘라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먹는 풍경은 생각만 해도 행복하고 더위를 잊게 해준다. 그런데 잘 익은 수박을 어떻게 고를 수 있을까. 예전엔 작은 삼각형 모양으로 수박을 떼어내어 색깔이나 상태를 직접 살피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낮았다. 그러나 요즈음은 이런 방법을 쓰지 않기에 주부들은 나름대로 잘 익은 수박 고르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아마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은 수박을 두드려 보고 소리를 듣는 것이다. 내 아내도 수박을 살 때면 열심히 두드린 뒤 맑고 울림이 좋은 소리가 나는 것을 고르곤 한다. 그렇다면 수박을 두드려 나는 소리와 수박의 익은 정도는 관계가 있는 것일까.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는 미국의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발명 아이디어를 선발해 연구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은 한 고등학교에서는 두드리는 소리를 이용해 수박의 숙성도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장치를 개발한 적이 있다. 그들은 먼저 수박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의 음색인 주파수를 측정한 뒤 수박을 잘라 당도를 쟀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주파수와 당도 사이엔 특별한 연관이 없었다. 즉 맑고 높은 소리가 나는 수박이 꼭 당도가 높은 수박이 아니라는 말이다.
수박을 두드려 보고 고르는 것은 정말 과학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다는 말인가. 결론적으로 말해 그렇지는 않다. 더 많은 연구를 통해 그들은 울리는 소리가 지속되는 시간이 수박의 당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두드렸을 때 울림의 여운이 길수록 당도가 높고 잘 익은 수박이라는 것이다.
수박의 익은 정도나 당도를 알아보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자른 뒤 당도를 측정하는 것이다. 수박의 표준 규격에 의하면 당도가 11브릭스 이상이면 특등급, 9브릭스 이상이면 상등급으로 규정하고 있다. 브릭스(Brix)는 당도를 나타내는 단위로 19세기 포도주의 원료가 되는 포도주스의 당도를 측정했던 독일 화학자(A F W Brix)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요즈음 사용하는 당도계는 빛의 굴절을 이용해 당도를 측정한다. 빛은 공기에서 액체 속으로 들어갈 때 꺾이게 된다. 만일 액체 속에 설탕 성분이 많아 밀도가 높아지면 꺾이는 정도가 더 커진다. 그러므로 입사된 빛의 꺾이는 각도를 측정하면 당도를 측정할 수 있다. 브릭스 단위는 순수한 물 100g 중에 들어 있는 설탕의 무게(g수)로 나타낸다.
소리를 통해 수박의 익은 정도를 검사하는 방법과 같이 어떤 물체를 손상시키지 않고 내부를 검사하는 방법을 비파괴검사라고 한다. 이러한 방법은 이미 의학이나 시설물의 안전진단 등에서는 널리 사용되고 있다. 내과 의사들은 청진기를 통해 몸 안의 소리를 듣거나 손으로 두드리며 소리를 들어 진찰을 한다. 역에서 기차 바퀴를 작은 망치로 두드려 소리를 들어봄으로써 바퀴 내부에 이상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검사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측정기술들은 초음파나 X선을 이용함으로써 더욱 발전했다. 초음파 검사 장치나 X선 단층촬영기(CT), 자기공명영상장치(MRI) 등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나이 든 사람들이라면 어릴 적 수박 서리를 하던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주인 몰래 따온 수박이 아직 설익어 풋내가 나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맛있게 나눠 먹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원두막에 앉아 숙련된 농부의 눈과 귀로 고른 잘 익은 수박 한쪽을 가까운 사람들과 나눠 먹을 수 있다면 이 여름이 그리 덥지만은 않을 것 같다.
@박용기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생체신호계측연구단장(게시일 2006-08-21 15: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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